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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 | 2017년 09호
산에서 배운다
글_한양대학교병원 외과 교수 권성준 기자 | 2017-11-23

본문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 이토록 산이 많다는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다. 더구나 수도 서울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짧은 시간 안에 산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으니 더없이 행복하다.

 내가 이처럼 산을 좋아 하게 된 것은 이제 한 20년 되었다. 군 의관 시절 동부 전선 최전방에서 의무 중대장을 지냈는데 그 시절 나는 DMZ 철책을 수시로 순찰하며 초소와 막사의 장병들 건강을 살펴보라는 연대장의 지시를 수행하였었다. 그러니 산에 갔다 오는 일이 얼마나 지겹고 싫었겠는가? 이런 저런 이유 대며 빠지기도 하였으나 그 시절 이후 당분간 산에는 가까이 가기도 싫었었다.

그렇던 나에게 산에 같이 다니자고 권유하는 친구가 있었다. 나와 양구 21사단에서 함께 근무했던 삼성의료원의 최덕환 교수이다.
 그 친구는 나처럼 의무 중대장이 아니고 야전병원에 근무하였기에 나처럼 허구한 날 의무적으로 산에 다녀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한 번씩 순회 진료 차례가 되면 다녀오는 것이기에 산에 대한 감정이 나와는 전혀 다르게 마음에 와닿았던 것이다. 그 친구는 전역 이후 누구보다도 열심히 산에 다녀 몸이 아주 건강해졌고 살도 많이 빠졌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의 여러번에 걸친 권유에도 불구하고 몇 년을 그냥 지내다가 어느 날 함께 청계산을 다녀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산행을 아주 즐기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직업의 스트레스 강도가 가장 높은 수준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듯이 나도 외과의사의 스트레스가 최고 수준이라 여기고 있다. 그런데 그 스트레스라는 것이 안 받으려 발버둥 쳐 봤자 어느 누구도 살아가며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어떻게 마음속에 앙금처럼 달라 붙어 있는 그 스트레스를 해소해 나갈 것인가의 답을 찾아 나섰고 결국은 산행에서 가장 큰 해소를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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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봄의 산을 찾으면 우선 “생명에의 외경”을 느끼게 된다. 지난겨울 무섭도록 세차게 휘몰아치던 눈보라와 강풍속의 그 추위를 헐벗고 가냘픈 가지는 어디에 숨겨 두었었는지 신비스런 에너지로 거뜬하게 이겨내고는 봄이 오는 소리에 맞추어 그야말로 연초록의 보석같은 새잎을 내민다. 그 모습은 정말로 두려울 만큼 대단한 것이다. 생명은 정말 대단한 것이로구나! 하며 절로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4월 마지막 주부터 5월 첫째 주 사이의 그 연초록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병원 외과병동 간호사들의 제안으로 회색빛의 일률적인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 챠트를 교수님 별로 구분하기 위해 서로 다른 색의 스티카를 붙이기로 하였는데 여러 가지 색 가운데 내 환자들 챠트에는 산을 좋아하는 나를 상징하는 색깔이라며 초록색 스티카, 어느 교수님은 아주 정렬적이시라고 붉은 스티카, 또 다른 얌전한 교수님 챠트엔 노란색 스티카를... 이런 식으로 구분해 놓고 있는데 나는 초록으로 표시해 준 그들에게 대만족이다.

 여름의 산에서 만나는 그 짓푸름은 바로 건강함의 상징이며 꽉 막힌 답답함을 풀어주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여름 산을 오르다 보면 짓푸른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강렬한 태양 에너지 덕분에 땀을 한참 쏟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내 몸속 노폐물이 모두 빠져 나가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럴 때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 한 줌이라도 불어 와 주면 절로 나오는 흥얼거림, “산 위에서 부는 바람 고마운 바람...” 그 어느 때의 바람이 이토록 고마웠던가?

 그렇게 땀을 흘리고는 어딘가 나무 그늘을 찾아가 집에서 준비해 온 소박한 도시락을 펼친다. 여름이면 난 빠지지 않고 상추쌈과 풋고추를 꼭 준비해 가지고 간 다. 몇 년 전 북한산 정상부근에서 한 부부가 이렇게 쌈을 준비 해 와서 점심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는 “바로 저거구나“하고 나서 매년 여름이 오면 땀 흘린 뒤 산속에서의 쌈밥을 즐기고 있다. 산에서 먹는 식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으로 소박한 찬거리로 가장 맛있게 먹고 있다. 고칼로리 식단으로 넘쳐나는 도회지 식생활 습관이 산속에서의 그 소박하기만 한 식단으로 습관화 된다면 이 또한 건강지킴이로써 한 몫을 하리라 본다.

 가을의 단풍은 산속 화려함의 결정판이다. 낙엽이 되어 땅 위에 내려앉기에 앞서 가장 고운 옷 으로 단장하고 있는 그 모습은 해마다 산이 우리들에게 선사하 는 빛의 잔치이다. 유명한 산들은 이때쯤이면 단풍보다 더 멋을 부린 수많은 등산객들로 시장통을 방불케 한다. 아무리 그 산의 단풍이 곱다하여도 나는 그런 시기의 그 산을 거의 찾아가지 않는다. 가뜩이나 도회에서 많은 사람들과 마주 하며 피곤해 진 내 몸과 마음을 추스리려고 찾은 산에서 또 그 런 인파에 휘둘리긴 정말 싫다. 단풍이 좀 덜 예쁜들 무슨 문제이랴. 좀 더 호젓함을 즐길 수만 있다면 그 화려함의 크고 작음 은 그리 대수롭지 않다.

 북한산은 국립공원답게 그 영역이 참 ​넓은데 북한산성이 위치한 곳은 사람들이 너무 많고 송추 쪽으 로 가다보면 사기막골을 통하여 오르는 숨은벽 코스를 즐겨 찾아간다. 그 곳에 가면 북한산의 그 어느 곳보다 호젓함을 즐길 수 있고 인수봉이 바로 코 앞에 올려다 보이는 주위 풍광이 너무 아름다운 바위가 있다. 내가 그 곳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그 바위 이름을 산에 같이 자주 다니는 선배께서 “권 바위”라 이름을 지어 주셔서 지금도 친구들 사이에선 “다음 주에 권 바위 같이 갈까?” 하고 전화할 정도이다. 나는 사 계절 산행 가운데 겨울산행을 제일로 친다. 눈이 덮혀 있고 바람이 강할수록 겨울 산행의 묘미는 더욱 커진다. 뺨을 스쳐가는 능선에서의 그 바람은 살을 에어 내듯 아프 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바람이 그리워지는 것은 왜인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벌써 7년째 2월이 되면 강원도 발왕산 정상에서 추위를 즐긴다. 눈꽃을 즐기며 발목을 훌쩍 넘는 눈밭을 계속 걸어보기도 하고, 경사진 스키 슬로프 가장자리를 오르내려도 보고 하면 곧 땀이 난다. 미리 쳐둔 텐트 안에 들어가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텐트를 스쳐가는 정상의 바람은 가히 특급 태풍의 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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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사람이 둘러 앉아 각자 다녀온 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설악산의 매력은 산의 이름에서 느껴지듯 겨울에 가장 크게 와 닫는다. 큰 산이면서도 어느 산보다 따스 한 느낌이 나는 것이 바로 설악의 제 맛이다. 그 설악을 실컷 즐기고 나서 저마다의 풍광이 서로 다른 중청 대피소, 소청 대피소, 희운각 대피소, 양폭 산장 등을 옮겨 가며 그곳에서 만난 산꾼들과 나누는 한끼의 식사와 한잔의 술은 산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교감이다. 이렇게 산을 자주 다니다 보면 좀 더 높은 산, 안 가본 산을 자꾸 가보고 싶게 된다.

 그런데 산이 높고 험해 질수록 등반자의 체력이 더 많이 필요 해 지는 건 당연지사이다. 내가 산행을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나고 나니 나도 더 높은 산을 올라보고 싶어졌지만 지금보다 훨씬 바빴던 그 시절이기에 산을 찾을 기회가 그리 자주 있지 않 았고 게다가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라 조금만 오름이 심해지면 숨은 턱에 차오르고 정상 등반은 수시로 중간에 포기하곤 하였다. 곰곰이 생각하였다. 나의 이 불량 체력으로는 높은 산 오름 뿐 아니라 외과의사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체력도 나이 들 수록 힘겨워지겠구나. 이런 불량 체력의 제일 큰 원인은 무엇일까?  그 물음에의 답은 금연이었고 금연이후 나는 보다 열심 히 등산을 할 수 있었으니 일거양득이 되었다. 금연은 나와의 약속일 뿐 아니라 산과의 약속이었기에 난 이 약속을 아주 오래 잘 지켜내고 있다.

 산에서는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고 물론 평지도 있다. 그런데 길이 좁아 한 줄로 밖에 이동이 안 되는 길목에서 상대방에게 먼저 가도록 양보를 하고 나면 왠지 내가 부자가 된 듯 한 뿌듯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좋은 산행 되세요”라며 인사하기가 산 저 아래에서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그래서 자주 하게 된다. 이 또한 산에서 자 주 배울 수 있는 일상 속의 여유로움이 아닐까?  여유로움! 이 얼마나 우리가 바라는 행복의 원동력인가? 바로 이 여유로움을 적어도 산에 가서는 충분히 느끼며 실천하고 오고 싶다. 아침에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면 아내는 늘 묻는다. “집에는 언제 돌아오세요?”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있기에 그렇게 물어 온 다고 생각하면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나타난다. 아내의 물음에 난 항시 같은 대답을 해 준다. “응, 오늘 내가 걷 고 싶은 만큼만 걷다가 올께요. 그런데 저녁 먹기 전에는 돌아 올 겁니다!” 항시 언제 돌아 오냐고 물어 오는 아내가 있어 더 욱 행복하다.

 그런데 산에 가 보면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이런 분들도 만나게 된다. 오늘 몇 시까지 산행을 하고 하산하여 어디어디로 움직여 무슨 무슨 일을 할 예정이란다. 한편으론 그렇게 빠듯한 일상 속에서도 산행의 기회를 끼워 넣 었다는 게 건강을 위해 그나마 다행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산에 가는 날 만큼은 다른 계획 때문에 신경 을 쓰지 않을 수 있을 때 훨씬 더 행복할 것 같다.

 몇 년 전 히말라야에 트래킹을 간 적이 있는데 서양인들의 느긋 함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로 구성된 트래킹 팀은 그 들을 앞질러 지나가기가 다반사였고 같은 일행 가운데서도 때론 경쟁적으로 빨리 가려고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나도 그런 행동에서 예외이지 않았다. 내가 보고 싶고 가고 싶었던 목표점으로 조금이라도 빨리 전진하여 그 목적을 이루겠다는 그 야말로 도회지에서 뼈 속까지 깊이 스며있는 기질이 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의 산행을 돌아다보고는 참으로 부끄러웠다. 주변의 그 아름다운 자연을 충분히 즐기며 천천히 올라 고산증도 피하고 풍광을 충분히 즐기라는 가이드의 충고를 뒷전으로 흘린 채 마치 목표점에 제일 먼저 도착하여 제일 먼저 바라보는 자만이 무리속의 승리자라도 된다는 듯한 그릇된 습관의 발동을 막지 못하였음이 부끄러워졌고 그 이후로 나는 행렬 가장 뒤에 가서 걷기 시작하였다. 맨 뒤에 가는 사람들은 간혹 나이가 들었거나 하여 속도가 원래 느린 분도 있었으나 적지 않은 또 다른 사람들은 그야말로 들꽃 하나에도 눈길을 주고 사진을 찍어가며 옆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진정으로 그 트래킹을 즐기고 있었다. 같이 온 일행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에서 여유로움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의 얼굴은 서두르는 사람들에 비해 왠지 한결 여유가 두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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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위암 수술을 전공하는 의사이다. 위 수술을 받은 환자 분들은 특히 식사를 천천히 오래 먹어야 소화도 되고 영양분으로써 흡수도 될 수 있다. 이렇게 산에 올라 자연을 마주하고 앉아 먹는 식사야말로 충분히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수술 받은 환자들에게 조그만 동산부터 큰 산까지 자 기의 체력에 맞추어 자주 다녀오시기를 권하고 특히나 산행을 갈 때는 가능하면 소박한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가서 좀 더 여유롭게 자연 속에서 천천히 식사를 즐기고 오시라 권유한다.

 언제나 바삐 살아가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있는 나를 포함한 많은 현대인들에게 미국의 인디언들이 가지고 있는 관습 가운데 한 가지를 소개한다. 그들은 적토마와 같은 탄탄한 말위에 올라 끝없이 펼쳐져 나가 는 황야를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다가 불현듯 말을 세우고는 내려서서 조금 전 자기가 질주해 온 뒤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얼마간 멈추어 서 있다가 다시 말에 올라타 달리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이는 너무 빨리 달려 온 육체를 미쳐 따라오지 못한 자 신의 영혼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기다림의 시간이 가진 의미를 산에 오르내리며 느끼고 돌아 올 수 있다면 산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참 크다고 느껴진다.

 인생의 후반기를 노래한 시인 고은님의 “그 꽃”이라는 짧은 시 를 소개한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나는 이 시를 산행하며 느낀다. 


 

대한암매거진 2017년 09월
지난 THECAN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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